민주성지 창원(마산)
3·15의거 유적지
※ 지도를 확대하시면 더 자세한 위치를 보실 수 있습니다.
3·15의거 발원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164-1
3·15의거 당시 2층 목조건물이었던 민주당 마산시당부 당사 건물(동판에서 오른쪽 건물) 앞.
1960년 3월 15일 오전 9시가 넘어서자 오동동 165번지에 위치한 민주당 마산시당부 앞에는 선거 번호표를 받지 못한 시민들이 떼 지어
몰려왔다. 그들은 ‘도둑맞은 내 표를 찾아 달라’고 의분심을 들어내며 호소했다.
유권자들은 부정선거의 실상을 낱낱이 설명하면서 항의에 가까운 하소연을 했다. 이러한 갖가지 부정선거의 작태를 보고받은 시당 간부들은 일제히
마산시에도 총 유권자의 20%에 해당하는 1만 3천여 명에게 번호표를 주지 않고 사전투표를 감행한 처사가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밝혔다. 투표
참관이 거부되는 바람에 오전 9시가 넘어설 무렵 시당 간부들이 모여 긴급히 확대 간부회의를 열게 되었다.
앞으로 행동할 방향과 대책을 진지하게 토의한 결과, 마산시당 상무위원장 황칠규가 제일 먼저 선거 포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어서 선거 무효와
당선 무효임을 내세워 유권자들의 기권을 종용하는 가두선전과 부정선거 규탄으로 이어졌다. 스피커를 통해서 시민들에게 “번호표를 안 주거나
공개투표를 강제로 시키면 이에 불응해야 하며 과감히 떨쳐 일어나 불의에 항거해 총궐기 하자”는 내용의 가두방송이 오동동과 불종거리 일대를
쩌렁쩌렁 울려댔다.
오전 10시 30분. 마산시당 앞부터 불종거리에 모여든 시민들과 함께 경남도당이나 중앙당에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마산시당에서 독자적으로 선거
포기를 선언, 선거부인공고를 내걸고 거리방송 및 시위를 시작했다. 단시간 내 플래카드, 머리 수건, 메가폰 등을 준비하고 먼저 코스, 시위방법,
구호, 행렬배치 등에 이르기까지 민영학 위원장의 전략에 따르기로 당원들은 뜻을 모았다.
오후 1시경 민주당 마산시당에서 오전에 경찰서에 갇혔다 풀려나온 정남규(도당위원장)와 동아대 학생 안종성이 스피커를 통해 당사 앞에 운집한
시민들에게 민주당 선거포기 경위와 부정선거의 실상을 거듭 밝히는 방송을 했다. ‘무지막지한 자유당 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말고 저항할 것과
매수·회유를 뿌리치며 분명히 떨쳐 일어나 투쟁해나가자’고 반복해서 호소했다.
오후 2시경 많은 사람들 속 민주당 창원을지구당 선거부장 장복열과 열혈 청년 이봉수 등이 앞장서서 “3·15는 부정선거다!” “협잡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목청껏 외치며 다녔다. 오동동 사거리와 불종거리 일대는 1,500여명에 이르는 시민, 학생들이 “와! 와!”함성을 내지르며
3·15 마산 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전 10시 30분
민주당 마산시당부 선거부인공고를 내고 선거무효를 선언
*오전 10시 30분~오후 2시
부정선거 무효선언, 오동동 당사에서 가두방송을 하며 민주당 간부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시작
*오후 2시 30분~오후 4시 30분
군중 가두시위하다 불종거리에서 경찰과 대치, 투석전 전개(민중당 간부 정남규, 강경술, 정경도, 황칠규, 정진철 등 강제 연행)
3·15선거 무효 선언문
3·15선거는 불법 무효임을 선언한다. 이번 정·부통령 선거만은 공명선거를 실시하여 온 겨레가 갈망하는 조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민족의 복리 증진을 이룩해 보자는 우리들의 비원은 폭력에 의하여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이승만 박사 집권 12년 만에 갈수록 불법화가 추잡해져 각 부정선거의 양상은 드디어 악의 절정에 달하였다. 민심의 완전 이반, 이로 인하여 민주 자유선거로는 도저히 집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자유당은 최후 발악으로 모든 경찰 수법을 총동원하여 최고의 포악 선거를 단행할 것을 결의하고
- 1. 헌법 정신에 위반되는 조속 선거
- 2. 야당의 인사 입후보 등록의 폭력 방해
- 3. 무수한 유령 유권자의 조작
- 4. 야당 선거운동원의 살상 자행
- 5. 대다수 참관인 신고의 접수 거부
- 6. 신고 된 소수 참관인의 입장 거부 또는 축출
- 7. 헌병, 경찰, 폭한에 의한 공포 분위기 조성
- 8. 기원 강요
- 9. 투표 개시 전에 4할 무더기 투표
- 10. 투표함 검사 거부
- 11. 내통식 기표소 설치
- 12. 3인조 강제 편성 투표
- 13. 4할 공개투표 강요
- 14. 공개투표 불응자에 대한 상해
- 15. 집단 대리 투표
등으로 민주주의 초석인 자유선거와 비밀투표 제도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아래 이루어진 민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간(强姦)행위이며, 따라서 자유당 후보자의 당선이 발표될지라도 이는 ‘당선’이 아니라 ‘주권강탈’에 불과한 것이다. 요컨대 이번 선거의 계엄령화와도 같은 공포 속에서 불법과 테러가 난동한 민주 파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본당은 자유·민주주의 도살(盜殺)을 막기 위해 피투성이의 투쟁을 계속해 왔으나 결국 도살되고 반민주주의 시체 앞에 놓고 통곡하면서 3·15선거는 공적으로 불법 무효임을 만천하에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1960. 3. 15-
3·15의거 발원지,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164-1 -
3·15의거 발원지,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164-1 -
3·15의거 발원지,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164-1 -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이 불종거리 민주당사 주변에 모여들고 있다. (주영진) -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마산시대책위원회에서는 불법과 금권으로 자행된 부정선거에 대해 “선거부인공고”를 3월 15일 낮 10시 30분경 벽보를 통하여 발표했다. (김일규) -
1960년 3월 15일 오전 10시 30분 정·부통령 “선거부인공고”를 내고 선거를 포기한 민주당원들이 오후 2시 30분경 거리를 뛰쳐나오고 있다. 이 나라 민주역사 발전의 새 장을 연 3·15의거 최초의 시위였다. 머리띠를 두르고 맨 앞장 선 사람은 정남규 씨이며 황칠규, 정경도, 정진철, 강경술 씨 등이 선도하고 있다. 이들은 현장에서 체포 구속되었다. -
3·15의거 60주년을 맞아 옛 민주당사 건물을 3·15의거기념사업회의 제안으로 창원시에서 매입하여 기념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3·15의거 기념탑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 84-325
3·15의거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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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정신을 계승시키기 위해 그 기념으로 공사 중인 3·15의거 기념탑 현장. 1962. 09. 20 준공식을 가졌다. (김일규) -
민주화의 불꽃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이곳 마산, 자유당 정권의 온갖 부정·만행·불의에 결연히 항거하여 싸웠던 1960년 3월 15일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3·15의거 기념탑 (김일규) -
3·15의거 기념탑에 새겨진 탑문 “저마다 뜨거운 가슴으로 민주의 깃발을 올리던 그 날 1960년 3월 15일! 더러는 독재의 총알에 꽃이슬이 되고 더러는 불구의 몸이 되었으나 우리들 은 다하여 싸웠고 또한 싸워서 이겼다” (김일규) -
3·15의거기념탑 제막식 현장 (김일규) -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3·15의거기념탑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김일규) -
현재 3·15의거기념탑 전경
무학초등학교 총격 담장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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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밤 마산 소방차가 시위대를 진압하려다 무학초등학교 주위 전봇대를 들이 받아 시내 일원 정전사태를 유발시켰다. (김일규) -
3월 15일 밤 경찰의 무자비한 발포로 무학초등학교의 담벼락에 난 총탄 자국. 경찰은 공포탄을 쏘았다고 발뺌하지만 살상을 목적으로 사람의 가슴과 머리를 겨냥해 발사한 것이 확인되었다.(총탄 자국의 위치가 사람의 머리, 가슴, 배 높이와 같음) -
무학초등학교 담벼락에 난 총탄자국 (4월혁명청사) -
3월 15일 밤 총을 맞고 죽은 김영준 군의 시체 앞에 친척이 통곡하는 가운데 어머니는 눈물마저 메말라 넋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다. (김일규) -
현재 무학초등학교총격담장 -
현재 무학초등학교총격담장
마산의료원(당시 도립마산병원)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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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된 김주열 "시체 어디 버렸나?" (국제신보 1960. 3. 22) -
김주열 군의 시체는 도립마산병원 (현, 마산의료원)으로 이송 안치되었다. 시민들이 태극기를 덮어 그의 애국정신을 알렸다. (동아일보 구입) -
김주열 군 시체 인양광경(상), 시체를 보기위해 도립마산병원에 운집한 시민들(하). (부산일보 1960. 4. 12) -
현재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
3·15의거 기념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104-2
1960년 3월 15일 밤 가장 격렬했던 의거 현장의 하나인 북마산파출소 인근에 거주했던 한학자 신동식 옹이 그날 경찰의 총격으로 윗부분이 파손된 돌에 3·15의거 기념비문과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 및 한시를 새겨 파출소 인근에 세웠다. 이후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약 20m아래 현 위치로 이전했다.
한 조각의 돌을 길가에 세워
의로운 역사를 새겨 두노니
이는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시민들의 노함은 막기 어려우며
뜨겁게 흘린 피는 역사에 남으리라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은
이를 어찌 본받지 않을 수 있으리
-
3월 15일 밤 불타버린 북마산파출소 현장. (김일규) -
북마산파출소 소실(상), 경찰 출동(하) (민주신보 1960. 3. 17) -
무고한 시민을 북마산파출소 방화범으로 누명을 씌워 체포,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가했다. 그 주동자 혐의를 받은 박세현(왼쪽), 정상숙 씨가 수갑을 찬 채 현장 검증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구입) -
북마산파출소 방화범으로 구속되었다가 무죄석방 중인 왼쪽으로부터 정상숙, 정현팔, 박세현 (부산일보 1960. 3. 25) -
현재 3·15의거 기념비
김용실·김영준 열사 추념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심온길
33(마산고등학교 내)
3·15의거 중 희생된 김용실, 김영준 열사를 기린 추념비로 마산고등학교 교문 바로 옆에 있다.
김용실, 본적 경남 창원군. 1943년 12월 17일 생. 김기우 씨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마산 성호국민학교, 마산중학교를 거쳐 마산고등학교 1학년 B반 급장으로 있던 모범학생이었다고 함. 기독교 신자로서 적극적이고 활달하며 야구, 등산을 좋아했고, 서울대학교를 지망하기에 학업에 열중하고 있었음. 3월 15일 밤 북마산 파출소 앞에서 두부관통 총상을 입고 도립 마산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회복되지 못한 채 숨졌음.
김영준, 본적 평북 신의주. 1941년 12월 15일 생. 주경옥 씨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1960년 3월 마산고등학교 졸업. 3월 15일 밤 시청부근에서 좌측 둔부에서 우측 하복부의 관통 총상을 당함. 도립 마산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다 숨졌다고 함.
이승만 정권은 그들 독재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부정과 불법이 극도에 이르렀다 주권을 빼앗긴 국민은 입이 있으나 말을 못하는 판에 참다못한 우리 마산의 학생들은 누적된 분노를 이 고장에 폭발시켰으니 김용실군과 김영준군은 그때 민주의 선봉에 섰다가 독재의 총탄에 쓰러진 우리 학교의 두 젊은 꽃이었다. - 김용실·김영준 열사 추념비 중에서
- 원래 추념비는 학교 안쪽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창회에서 일반인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바깥쪽으로 옮겼습니다. 김용실의 형과 김영준의 누나가 결혼을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죽은 이후 사돈관계가 되었습니다.
-
1960년 7월 20일 김용실, 김영준 군 민주의거 추념비 제막식이 유가족, 동창회 재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마산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김일규) -
1960. 7. 20 건립된 김영준, 김용실 추념비 (마고20회 졸업앨범) -
김영준, 김용실 추념비 제막식 추도사 낭독 (마고20회 졸업앨범) -
김영준 김용실 추념비 제막 (마고20회 졸업앨범) -
김영준, 김영실 추념비 제막 후 기념 촬영 (마고20회 졸업앨범) -
마산고등학교 19회와 21회 동창회에서는 1992년 기존 추념비를 학교 운동장에 묻고 새 추념비를 만들어 그 높은 뜻을 다시 기렸다 (라상호)경 -
김영준 열사 -
김용실 열사 -
현재 김용실·김영준 열사 추념비
김영호 열사 추도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학교단지로
53-1(마산중앙중학교 내)
3·15의거 시위 도중 희생된 김영호 열사를 기린 추도비로 교문 가까이에 있다.
김영호, 1942년 9월 1일 경남 창녕군 출신(당
19세). 김위술 씨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마산 무학국민학교, 마산중앙중학교를 거쳐 마산공고 야간부 2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활달한 성격에
바둑을 잘 두었고, 경제학자가 되는 것이 장래 희망이었다고 함. 3월 15일 밤 마산 시청 부근에서 후두부 관통 총상을 입고 숨졌다.
비문우측: 1942년 9월 1일 마산시 출생. 마산중앙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 1960년 3월 15일 밤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쟁하다 마산시청
앞길에서 흉탄에 순국.
비문좌측: 지키고 싸워서 세우자 여기 독재와 싸우다 숨진 민주의 파병은 누웠노라.
비문 뒷면: 마산중앙중학교 학우일동. 1960년 7월
-1960년 7월 추도비가 처음 세워진 곳은 마산시 완월동 218-1 옛 마산중앙중학교 교정이었습니다. 이후 마산중앙중학교가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추도비도 함께 옮겨졌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세워져 있던 것을 3·15의거기념사업회와 3·15의거유족회가 현재 자리인
교문 입구로 이전 설치하였습니다.
-
3월 15일 밤 희생된 김영호 군의 모교 중앙중학교에서는 김 군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기 위해 교정에 추도비를 건립했다.(허종) -
마산중앙중학교에 건립된 김영호 군 추도비(허종) -
추도비 제막 학생대표 추도사 광경(허종) -
후배들이 김영호 추도비 건립에 그 뜻을 함께 하고 있다.(허종) -
현재 김영호 열사 추도비 -
현재 김영호 열사 추도비
강융기 열사 추도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학교단지로
52(마산공업고등학교 내)
3·15의거 시위 도중 희생된 강융기 열사를 기린 추도비로 교정 안쪽에 있다.
강융기, 1941년 8월 13일 산청군 출신(당 20세).
마산공업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 투쟁하다 남성동 파출소 앞에서 복부 관통상을 입고
<구외과>에서 치료 중 동년 4월 10일 사망. 같은 해 5월 25일 학우 일동이 교내에 추모비를 세워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원래 이 강융기 열사의 모교인 마산공업고등학교가 현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교정에 세워져 있던 추모비를 학교를 이전하면서 같이
옮겨 이 자리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비만 하나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지만 이전하면서 옆에 경계석을 조성하였습니다.
-
마산공고 재학생 강융기 군은 3월 15일 총상을 입고 입원 치료 중 4월 10일 사망했다. 그를 가리기 위해 모교에 추도비를 세웠다.(마산공고8회 졸업앨범) -
강융기 추도비 제막식 현장(마산공고8회 졸업앨범) -
강융기 추도비 제막식 현장(마산공고8회 졸업앨범) -
3·15의거 희생자 마산공고 강융기 군의 추도비가 많은 후배들이 참석한 가운데 세워졌다.(마산공고8회 졸업앨범) -
강융기 열사 초상화(김영실 화가 복원) -
현재 강융기 열사 추도비 -
현재 강융기 열사 추도비
3·15기념회관 모형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서남1길 5
마산노인종합복지관
1962년 9월 20일 이곳에 3·15의거 정신을 기리고 시민문화증진을 위하여 3·15기념회관이 건립되었다. 그동안 사용해 오던 건물이
노후화되어 2006년 이를 철거하고 노인종합복지회관을 신축했다. 오늘 이 자리에 3·15기념회관 원형모형을 제작 설치하여 3·15의거 투쟁사의
역사적 의미를 증거로 남긴다.
-1990년대 말, 처음에는 이곳에 3·15기념회관을 재 건립하기로 하였으나 마산시의 제정여건이 어려워 3·15의거기념회관과 문화예술회관을
통합하여 건립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어 관련단체(3·15의거 관련 단체 <유족회, 부상자회, 기념사업회>, 문화예술 단체, 시민사회
단체) 등이 논의한바 통합하여 짓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통해 현재의 3·15아트센터가 건립되었습니다. 3·15아트센터에는 3·15의거기념사업회
사무실과 홍보관, 자료실 등이 있습니다.
-
제막식 행사가 있던 날 서성동 거리 연도에 모인 시민들. 뒤로 완공된 3·15기념회관이 보임(김일규) -
1962년 12월 22일 3·15의거 기념회관 개관 축하문화제가 개최되어 그 깊은 뜻을 기렸다.(김일규) -
다채로운 내용으로 진행된 이 날 행사에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참석하여 3.15의거 정신을 더욱 빛냈다.(김일규) -
3·15의거 기념회관 개관 축하문화제 현장. 각종 무대공연을 펼쳤다.(김일규) -
3·15의거 기념회관 개관 축하문화제 공연 현장(마산일보 1962. 12. 23) -
3·15기념회관 모형 -
3·15기념회관 모형 -
현재 마산노인종합복지관
김주열 열사 흉상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허당로
51(용마고등학교 담장 옆)
김주열, 1944년 10월7일 전북 남원 생. 김재계씨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금지동국민학교, 금지중학교를 거쳐 마산상고에 응시 합격한
상태였음. 적극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며, 영웅전을 즐겨 읽으면서 정치가의 꿈을 키웠고 웅변도 뛰어났다고 함. 또한 은행원의 꿈도 함께 키웠다고
함. 3월 15일 밤 마산시청 앞 시위대 속에서 얼굴에 최루탄을 맞고 숨졌음.
-2000년 3월 15일 입학 동기인 마산상고 37회 졸업생들이 뜻을 모아 마산상고 내에 흉상을 세웠고 2002년 3·15의거 52주년을 맞아
(사)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기존에 제작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같은 흉상을 제작하여 남원시에 기증하였습니다. 그 흉상은 남원김주열열사 기념관에
설치되어있습니다. 그 이후 학교 담 개방 공사를 하면서 담장 밖으로 옮겨졌고, 2008년 4월 11일 (사)3·15의거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조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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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김주열 열사 흉상 모습 -
현재 김주열 열사 흉상 모습 -
현재 김주열 열사 흉상 모습 -
김주열 열사 초상화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포동1가 47-6
외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독재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거한 3·15의거에서 김주열 열사가 행방불명 된 지 27일만인 4월 11일. 동판
바로 앞 3m 전방에서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올랐다. 이와 같은 만행에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민중봉기로
폭발했다. 2차 3·15의거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 마침내 4·19혁명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곳을 ‘4월 혁명 발원지’
라고 부르게 되었다. 2011년 9월 22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77호로 지정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장소가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3월 15일 시위 당시 실종되었던 김주열이 27일 만에 이곳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처참한 모습으로 떠올랐습니다. 이곳에서 낚시를 하던
시민들이 이상한 물체를 보고 배를 타고 나가 확인을 해보니 수상한 시신이었습니다. 3·15 때 실종된 학생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신문기자에게
먼저 제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문기자(허종, 부산일보)가 제일 먼저 달려와 사진을 찍었습니다. 만약 시민이 경찰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렸다면 역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
김주열 열사 동상
국립3·15의거민주묘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성역로 75
국립3·15민주묘지는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에 맞서 고귀한 희생을 하신 3·15의거 유공자분들이 잠들어 있는 성스러운 곳이며, 선열들의 혼이 담겨있는 성역이다. 3·15의거 희생자들을 모신 곳으로 1998년에 기공하여 2003년에 준공되었다. 국립3·15민주묘지는 민주의 문(탑), 정의의 상, 참배의 공간(참배단, 정의의 벽, 민주의 횃불), 3·15기념관, 유영봉안소, 상징문, 기념시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국립3·15민주묘지 -
민주의 문(탑), 정의의 상 -
참배의 공간
3·15의거 시가 있는 길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성역로 75
취지문
1960년 3월 15일!
이날은 이승만 독재정권이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부정선거를 저지르자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맨몸으로 분연히 떨쳐 일어나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켜낸
거룩한 민주화운동의 첫날이다.
그 자랑스러운 3·15의거 희생과 동력이 있었기에 4월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항쟁의
민주화 여정이 가능했으며, 오늘날 자유·민주·정의 사회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5의거 50주년과 국가기념일 제정 원년에 그날의
함성과 감격을 시로 승화시켜 노래한 10편의 3·15의거시를 가려 뽑아 빗돌에 새긴 뜻은 3·15의거의 민주정신이 우리나라 미래의 희망이 되도록
민주화운동 첫날의
순결한 표징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이 길을 따라 시를 읽으며 가는 사람들이여!
여기에 마산사람의 불멸하는 민주 혼이 서려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그대들 마음도 이 길 따라 함께 포개지면서 3·15의거의 큰 역사를
품게 될 것이다.
2010. 3. 15
(사)3·15의거기념사업회
3·15의거 기념조형물(1)-3·15의거 학생참가 기념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 84-325
3·15의거기념탑(공원 내)
3·15의거 학생참가기념비
- 3·15 민주의거의 주인공들을 기리며 -
3·15 민주의거의 주인공은 ‘마산의 학생’이었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역사’며 변하지 않은 ‘명제’입니다. 당시 마산고등학교,
마산공업고등학교, 마산상업고등학교, 마산창신고등학교, 마산여자고등학교, 마산제일여자고등학교, 마산성지여자고등학교, 마산간호고등학교 등 8개 고교
학생이 주역이었습니다.
교명에 있는 ‘마산’이란 지명의 학교 학생은 16, 17,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1960년 3월 15일 이전부터
경찰의 감시에 불구하고 부정선거 반대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리고 당일 거리로 나와 일부 학생들은 선두에 서고, 일부 학생들은 부상자를 치료하며
3·15 민주의거의 도도한 강물을 이끌었습니다.
그들의 용기는 애국심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애국학생’이란 이름을 드립니다.
민주주의 역시 애국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껍질만 남은 민주주의는 필요치 않다’는 그들의 구호가 지금까지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교내에서
막혔지만 저지선을 뚫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용기였기에 3·15 민주의거가 있었고 마산시민들의 분노와 함성을 더하게 했습니다.
학생이 경찰에 쫓기면 시민이 앞장서 집안에 숨겨주던 의거의 미담은 마산에서 시작됐습니다. 그건 인지상정이며, 3·15 민주의거가 목숨을
걸고 지켰던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운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해가 컸습니다.
3·15 1,2차 민주의거에 12명이 이슬로 사라졌고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부상을 입고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습니다.
1960년, 마산이란 이름을 단 고등학교는 위대한 역사를 가진 자랑스러운
학교입니다. 더하여 4월 13일 2차 의거에 참가한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대학생들도 기억합니다. 정의로운 학생들이 있어 3·15 민주의거는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독재를 물러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성지이며, 오늘날 조국의 민주화를 이룬 출발점입니다. 이
비 앞에서는 누구든 3·15의거에 희생된 영령에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해주십시오.
(사)3·15의거기념사업회는 이 비를 당시 마산의 8개
고교와 학생들에게 삼가 바칩니다.
2020년 11월 일
3·15 민주의거 예순 해를 맞아
(사)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짓고 세우다.
3·15의거 기념조형물(2)- 2차 3·15의거 시작점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231
마산의료원(입구 좌측 도로변)
김주열 열사의 주검이 살아 있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으니
‘아! 김주열 열사’
3·15의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김주열 열사 이름 앞에 ‘아!’라는 감탄사를 붙인다. 그건 김주열 열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존경을 담은 감사다. 여기, 당시 경상남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은 1960년 3월 15일
실종된 김주열 열사가 ‘거룩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곳이다.
당시 전북 남원에서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한 김주열 열사는 3월
15일 발표예정일에 합격자명단을 보러 마산에 왔다가 그날 밤 시위에서 실종됐다. 역사 앞에 감춰지는 비밀은 없다. 김주열 열사는 실종된 지
27일 만에 4월 11일 오전 11시쯤 마산 중앙부두 200m 앞 바다에서 3·15 부정선거와 시민의 분노를 증언하듯 꼿꼿하게 떠올랐다. 오른
쪽 눈에 미제 최루탄이 박힌 채.
김주열 열사의 주검은 선 채로 떠 있었다. 인양된 김주열 열사의 주검은 ‘마산시청 쓰레기 청소차’에
실려 도립마산병원 ‘시체실’로 옮겨졌다. 마산은 다시 일어섰다. 학생들도 조직적으로 참가했다. 이것이 3·15 2차 의거였다. 4·19 혁명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었고 이승만 정권을 물러나게 한 시작이었다.
3·15 1차 의거 이후 정권과 경찰의 검거열풍에 마산은 엉거주춤해 질
수밖에 없었다. 흉흉한 소문만 떠돌았다. 그때 김주열 열사가 주검으로 부활했다. 1차 의거에 참여한 1만의 시민, 학생이 2만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이곳을 둘러싸고 열사의 주검을 지켰다. 결국 죽은 김주열 열사가 살아 있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그의 나이 꿈 많은
17살이었다.
역사는 김주열 열사에게 빚을 진 셈이다. 그의 주검이 마지막으로 머물렀고 마산시민이 지킨 그의 분노 앞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부르기에 어떤 존경과 감사로도 부족하지 않는가!
2020년 월 일
3·15 민주의거 예순
해를 맞아
(사)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짓고 세우다.
3·15의거 기념조형물(3)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210
마산합포구청(입구 좌측 도로변)
정의로운 분노가 피운 위대한 애국심의 꽃이었으니
3·15 민주의거는 자유당 부정선거에서 비롯됐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부정선거로 준비해왔다. 치밀하게
준비된 부정 투표용지는 사전에 투표함을 채우고 유권자는 투표를 한 것으로 조작됐다. 많은 마산시민들이 투표소에서 ‘선거번호표’가 없어서
돌아서야만 했다.
그날 선거번호표를 잃어버린 마산시민들은 당시 오동동에 위치한 민주당 마산시당 앞으로 모여들었다. 국민의 주권인 ‘소중한
한 표’를 강탈당한 것에 항의했다. 그 정의가 마산시민들에게 선거무효를 선언하게 하고 선거포기로 이어졌다. 그건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 불복종
운동’에 다름 아니었다.
마산합포구청은 당시 마산시청으로 선거 개표소가 있던 자리였다. 시청 앞의 큰 도로(현 3·15대로)가
마산시민에겐 생과 사의 전선이었다. 경찰은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실탄사격을 가했다. 그렇게 3월 15일의 밤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앞엔 마산의 학생들이 서 있었다. ‘경찰이 학생을 쏘아 죽였다.’는 단말마의 고통 같은 전언은 순식간에 마산을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물들였다. 골목에서 거리에서 자유와 정의의 함성의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마산시청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밤이 깊어지자 1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마산시청 앞으로 강물처럼 여흘여흘 흘러와
정의의 바다를 이루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이들을 폭도로 규정했다. 실탄사격은 계속됐다. 그 거리에 학생과 시민의 시신이 뒹굴었다, 그날
밤사이 모두 9명의 학생과 시민이 희생되었다.
의로운 주검들은 동료학생들에 의해, 시민들에 의해 경상남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으로
옮겨졌다. 묻는다. 이들이 폭도였나.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건 분노에서 나온 애국심이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이 보여준 거룩한
애국심의 꽃이었다. 여기 이 거리 위에서 뜨겁고 붉게 피어난.
2020년 월 일
3·15 민주의거 예순
해를 맞아
(사)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짓고 세우다.
3·15 의거 발원지 기념관
마산 합포구 문화의 길 54
여러분은 지금 대한민국 민주화의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2021년 10월 26일(화) 창원시 마산합포구 민주화거리(명예도로명, 문화의 길 54) 시작점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이 개관했다. 1960년 3월 15일 바로 이곳에서 부정선거로 인해 표를 잃은 마산시민들이 모여들며 민주당원들이 전국 최초로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가두시위를 시작한 곳이다. 목조건물의 옛 민주당사가 위치했던 자리며, 1977년 건립된 건축물을 리모델링 했다. 기념관이 들어서기 전까지 3·15의거 발원지를 나타내는 동판이 바로 앞 거리에 박혀있던 상황이었다.
그동안 (사)3·15의거기념사업회를 비롯한 민주화 단체, 지역구 시의원 및 언론 등 각계각층에서 옛 민주당사 보존과 3·15의거 기념관 건립을 지속해서 요청하고 건의했다. 이러한 목소리에 창원시는 민선 7기 출범과 사업비 총 45억 원을 확보하여 2019년 7월 건물매입, 2020년 9월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공사과정에서 민원(연접건물 민원 협의에 따른 공사 지연)이 발생하여 사업추진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역주민과 상인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로 2021년 7월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건립공사를 완료했다.
기념관은 총면적 743.84㎡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에 지하 1층 영상실, 지상 1~3층 역사 전시실로 3·15의거 당시 시대 상황을 표현하고 있으며, 4층은 사무공간과 회의실로 운영된다. 1층에서 4층은 엘리베이터 및 계단을 통해 이동할 수 있다. 지하 1층은 계단을 통해 이동할 수 있다. 화장실은 1층에서 4층까지 층마다 배치되어 있다.
기념관은 1960년 3월 15일부터 4월 26일까지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사진, 영상, 유물 등을 통해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기념관 내 자료는 (사)3·15의거기념사업회 소장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됐다. 시민, 학생 등 방문객에게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이 될 수 있도록 2021년 8월 6일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관리 및 운영 조례’에 따라 9월부터 학예사 등 3명의 전문직원이 채용되어 운영되고 있다.
기념관 정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내접수대에서 코로나19 발열 체크 및 방문 등록과 입장표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옆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깊은 울림’을 주제로 ▲대한민국 현대사 연대표 ▲ 3·15의거 의의 ▲3·15의거 발생 배경 ▲옛 민주당사 재현 입체영상 등 사진 자료와 설명을 볼 수 있다.
엘리베이터 및 계단을 통해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강건한 울림’을 주제로 ▲3·15 부정선거 방법 ▲3·15의거의 전개 과정 ▲3·15의거와 4·19혁명 등 사진 자료와 유물, 영상 방명록 및 인증사진 포토존이
구성되어 있다.
3층 전시실은 ‘힘 있는 울림’을 주제로 ▲민주화 운동사 ▲민주화 유적지 ▲OX 퀴즈 ▲민주화 서적 ▲민주화운동 교육실 등 사진 자료와 영상시설이 갖춰져 있다.
지하 1층 영상 상영관은 3·15의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감상할 수 있으며, 휴게공간에는 3·15의거를 재현한 아트조형물을 볼 수 있다.
특히, 마산 원도심에 자리한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은 국립3·15민주묘지에 있는 3·15의거기념관과 더불어 그날의 3·15의거 역사 및 ‘자유·민주·정의’인 3·15의거 정신을 통해 대한민국 민주주의 교육의
장으로서 일상 속에 스며들 듯 시민들의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 기념관에서 느낀 민주화운동의 다양한 기억을 재해석하고 기념관 문을 나서면 그날의 함성이 다시금 들리듯 대한민국 민주화의 출발점인 이곳에서 바쁜 일상에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우리 지역의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함성을 듣게 될 것이다. 더불어 역사 현장인 민주 성지 마산 3·15의거 유적지 코스와 연계하여 걸으면 의로운 그날인 3·15의거를 가슴 깊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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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실 - 01 -
1층 전시실 - 02 -
1층 전시실 - 03 -
2층 전시실 -
3층 전시실 -
1960년대 옛 민주당사